본문 바로가기
알.쓸.빙.잡/역사상식

쑨원의 중화혁명당과 중국국민당, 쑨 원의 혁명 투쟁

by 서리니 2018. 6. 14.

쑨원의 중화혁명당과 중국국민당, 쑨 원의 혁명 투쟁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개조하여 중국국민당을 결성하였습니다.

기존의 중화혁명당은 쑨원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한 비밀결사였지만 쑨원은 국민 정당으로서의 중국국민당을 성립시킨 것이죠,   한편, 천두슈 측은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고 1921년에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을 결성하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은 외국의 간섭전쟁과 내전에 직면해 있어서 이런 위기를 타개하고자 손을 잡을 수 있는 국외 세력을 서둘러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코민테른은 중국혁명의 담당자를 국민당으로 보고 쑨원에게 공산당원을 동료로 받아들여 달라고 설득하였습니다.






쑨원은 전시에 소련이 공산주의에서 조금 후퇴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삼민주의의 타당성에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공농부조 라는 3대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는 소련과 연대하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며, 노동자나 농민의 운동에 협력하자는 내용입니다.

이에따라 국민당이 공산당원을 받아들이는 식의 협력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이것을 '국. 공합작'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은 원래 물과 기름입니다.

국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이고 공산당은 노동자 정당이므로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적이 있는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협력을 할 수 있겠지만 금세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1924년에 두 정당은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이듬해 급사하였는데 그의 유언 가운데 유명한 말이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입니다.

이것은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인데, 이는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혁명은 언젠가 꼭 성공하지만 자신이 살아 생전에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혁명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원통함이 이 한문장에 어려 있는 듯합니다.





또한,  쑨원이 사망한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상하이의 영국 조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개입으로 사상자가 나온 것입니다.

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노동자들이 이 사건을 빌미로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갑니다.


그러자 서구 열강과 매판자본의 위기감도 고조되었습니다.

매판자본이란 열강에 붙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자본가를 말하는데, 결국 그 압력으로 장제스가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댓글